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내전 (문단 편집) ==== [[다섯 황제의 해]] ==== ||<-3><:> '''[[다섯 황제의 해|{{{+1 {{{#FFBF00 다섯 황제의 해 [br] Annus Quinque Imperatorum }}}}}}]]''' || ||<-3><:> {{{#BA0E09 193년}}} || ||<:> '''{{{#FFBF00 황제}}}''' ||<-2>[[페르티낙스]][br][[디디우스 율리아누스]][br][[페스켄니우스 니게르]] [br] [[클로디우스 알비누스]][br][[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3> || ||<-3><:> '''[[역대 로마 황제|{{{#FFBF00 로마 제국의 왕조}}}]]''' || ||<-2><:>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세베루스 왕조]] || [[콤모두스]]가 서기 192년 12월 31일 암살당한 이후, 원로원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두 사위 [[폼페이아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이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손자들에게 황제 자리를 제안한다. 하지만 이들은 콤모두스 시대의 폐단을 시정하고, 국가 안정이 우선이라면서 거절한다. 그러자 원로원은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와 사전교감을 거쳐 황제 자리를 제안받았던 [[페르티낙스]]에게 황제 즉위를 요청한다. 따라서 로마 제국 안에서 1세기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이어 2세기 100년간 로마의 황금기를 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문을 닫게 된다. 페르티낙스는 피폐한 제국 재정을 개선하고자 노력했으나 그 과정에서 각종 경비와 군사 예산을 삭감하려던 것이 군의 반발을 샀다. 더욱이 그는 콤모두스 폐단을 시정한다는 이유로, 관료들을 이런 저런 이유로 추방하는데 이 과정에서 국고를 채우기 위해 콤모두스 시대처럼 [[매관매직]]을 황제가 나서서 벌이고 민심회복이라면서 면세지 선정을 하는 등 기대치와는 동떨어진 실책을 벌인다. 이렇게 상황이 진행되자 원로원, 관료들은 큰 실망을 하게 됐고, 때마침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 한 약속을 어기고 근위대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안 주면서 이들을 개혁대상으로 몰아 황제와 근위대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다. 근위대장 라이투스와 그 부하들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족들에게 가야 할 제위를 페르티낙스에게 넘기는 대가로 보너스를 기대했었고, 라이투스는 고향 푸닉 지방과 가까운 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직을 원했다. 따라서 페르티낙스가 자신들에게 콤모두스 실정 책임을 돌리며 근위대 비난을 강화하자,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다행히 원로원과 민중들은 새황제의 근위대 개혁을 지지해, 시간은 페르티낙스 편이었다. 이에 근위대는 기회를 엿보다가, 곡물 문제로 오스티아 항구에 시찰나온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페르티낙스는 전쟁영웅으로 군부의 존경을 받는 명성을 생각해, 호기롭게 평화 교섭을 제안했다가 근위대에게 [[다굴|집단구타]]로 [[하극상|살해]][[상관 살해|당했다]]. 페르티낙스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다. 그는 페르티낙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내내 장군, 원로원 의원, 집정관으로 명성을 쌓은 이로 콤모두스 치하에서 바른 소리를 했다가 여러 차례 죽을 위기를 넘긴 거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즉위하는 과정은 황제 자리를 경매로 팔아치운 라이투스와 근위대의 농간으로 우습게 됐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제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페르티낙스 장인과 황제 자리를 놓고, "근위대에게 화끈한 보너스를 누가 많이 주느냐"로 결정나서 정통성이 크게 훼손되는 꼴이 됐다. 따라서 콤모두스가 암살된 직후부터, 황제 자리에 욕심을 가지고 있던 각지의 야심가들이 하나 둘 황제를 칭하기 시작한다. 맨 먼저 황제를 칭한 사람은 판노니아 사령관이자 이 일대 총독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하지만 영악하고 비열한 세베루스는 상황을 보면서 황제 참칭을 정식 발표하지 않고, 누군가 먼저 황제를 칭하길 기다렸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는 덕망 있고 법 원칙을 준수하기로 이름난 여러 인사들의 이름이 거론되는데, 이 여론에 맞춰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가 황제를 자처하고 이를 로마 원로원에 통보한다. 그러자 중간에 편지를 가로채 이 사실을 알게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두 번째로 황제를 선언. 이어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세번째로 황제를 선언한다. 이렇게 네 명이 서로 황제라고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급박해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세베루스와 연락을 취하면서 제 갈 길을 찾고 있던 라이투스를 제거한 뒤 폼페이아누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에게 공동황제를 제안하면서 그들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그러나 안토니누스 황족들은 모두 이 제안을 거절. 이런 상황에서 도나우 강 유역의 로마군 주력을 이끌고 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진군 이후, 거의 200년 만에 군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온다. 따라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원로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세베루스에게 다시 공동황제를 제안하는데, 원로원과 근위대는 유리한 협상 위치를 점하기 위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체포해 죽인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처형장으로 끌러갔다가 죽은 뒤, 세베루스가 로마에 들어와 반협박하는 모양새로 원로원에게 정식 황제로 승인된다. 세베루스는 전임자 페르티낙스를 죽인 죄로 이탈리아 출신들로 구성된 기존 근위대를 해산해버리고, 제 부하들로 근위대를 재창설. 이후 원로원에게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 약속을 손바닥 뒤엎듯 파기한 다음, 자신이 한때 존경했던 페르티낙스 죽음과 연루된 이들을 구금. 이어 살해된 뒤 방치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시신을 수습해 유가족에게 인도하고, 이 사건을 빌미로 원로원을 다시 한번 손본다. 다섯 황제의 해 이후 196년까지 3년이라는 세월 동안 각 세력 간의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는데, 세 경쟁자 중 먼저 나가 떨어진 쪽은 파르티아까지 내전에 끼어들게 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였다. 이때 세베루스는 브리티나아와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 북쪽을 차지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주고 동맹을 맺어 니게르를 제거했다. 그러나 황제 자리는 하나였고, 세베루스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격돌하게 된다. 루그두눔 전투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쪽은 냉혹하고 교활한 면에서 한수위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세베루스 승리 이후, 원로원 안에 있던 니게르, 알비누스 지지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원로원을 개편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로마 제국에는 약 30년 동안 지속된 [[세베루스 왕조]]가 열린다. [clearfix]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